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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 스튜어트 밀 ( 인물 )

by 평싸10 2024. 2. 21.


존 스튜어트 밀은 1806년 5월 20일 태어나 1873년 5월 7일에 사망했으며, 19세기 철학, 고전 경제학자였으며, 영국의 철학자, 사회학자, 정치경제학자로서 사회평론, 논리학 등에 걸쳐서 방대한 저술을 남겼다.

-생애

밀의 아버지 제임스 밀은 1818년에 [영국령 인도의 역사]를 출판하는데, 그즈음에 열 두살이 된 존 밀은 스콜라철학의 논리학을 치밀하게 공부하는 동시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 저서들을 원전으로 읽었다. 이듬해에는 정치경제학 공부를 시작하여, 아버지의 도움을 받으면서 애덤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를 공부했다. 이는 자본, 노동, 토지를 생산의 3요소로 바라보는 고전 경제학의 시각이 밀 부자에 의해 완성되는 결과로 이어졌다. 아버지 밀은 산책 시간을 이용해서 아들 밀에 정치경제학을 강의했고, 아들은 배운 내용을 보고서로 만들어 제출하여 교정을 받았는데, 이 원고는 후일 아버지 밀이 출판한 [정치경제학 요런]의 초고가 되었다. 이 책은 리카도 경제학을 충실하게 답습한 교과서로서 당대를 풍미했다. 리카도는 아버지의 가까운 친구로 소년 존을 자주 집으로 불러서 함께 산책하면서 정치경제학에 관한 대화를 나눴다. 

8살부터는 문학과 철학 용어인 라틴어와 유클리드와 대수를 배우기 시작했고, 동생들에게는 가정교사 역할을 수행했다. 여전히 주로 역사책을 읽었는데, 호라티우스, 오비디우스, 베르길리우스, 타키투스, 호메로스, 디오니소스, 소포클레스, 유리 피데스, 아리스토파네스, 투키디데스 등 당시 일반 학교와 대학에서 읽히던 라틴어와 그리스어 고전 작품들을 모두 섭렵했다. 그리하여 10살이 되었을 때에는 플라톤이나 데모스테네스의 원전을 술술 읽을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아버지는 그로 하여금 시를 공부하고 지어볼 필요도 중요하게 생각했는데, 그가 초기에 지은 시 가운데는 [일리아스]의 이야기를 연장해서 지어본 습작도 있다. 남는 시간 동안에는 자연과학 서적과 [돈키호테]나 [로빈슨 크루소]와 같은 대중소설도 읽었다.

존 스튜어트 밀은 영국 런던의 펜톤빌 에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철학자이자 역사학자인 제임스 밀의 6남매 중 장남이었다. 존 스튜어트 밀의 교육은 그의 아버지에 의해서 주로 이어졌고, 때로 공리주의 철학자인 제러미 밴 담과 프린세스 플레이스 에게 도움을 받았다. 제임스 밀은 지극히 엄격한 방식으로 존을 양육하면서 다른 사람들로부터 잘못된 영향을 받지 않도록 동생들 말고는 같은 또래 아이들과 어울릴 수 있는 여지를 차단했다. 벤담을 지지하고 관념 연합설에 찬성한 아버지 밀은 벤담과 자기가 사망한 후에 공리주의의 전파와 실천을 이어갈 후계자로서 천재적인 지식인을 만들어 낸다고 하는 명시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밀은 두드러지게 조숙한 아이였다. 3살에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해서 알고 있던 영어 단어에 상응하는 그리스어 단어들을 배웠다. 8살이 될 때까지 그는 이솝의 [우화들], 크세노폰이 쓴 [귀 로스 왕의 아시아 원정기],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그리스어로 읽었고 루키아노스 라에르티우스, 이소크라테스 그리고 플라톤의 대화편 중 여섯 편을 그리스어 문장으로 접했다. 아울러 영어 문헌으로는 대단히 많은 분량의 역사책을 읽었고, 산수를 터득한 상태에 도달했다.

14살 때 밀은 제러미 벤담의 동생 사무엘 벤담의 가족과 함께 프랑스에서 일 년을 보냈다. 프랑스 산악지방의 풍경은 그에게 깊은 인상을 남겨 일생 산골 경치를 좋아하도록 이끌었다. 아울러 프랑스 사람들의 활발하고 친근한 생활 태도에서도 깊은 인상을 받았다. 몽펠리에의 과학대학에서 화학, 동물학. 논리학 강의를 들었고 개인교습을 통해 고등수학을 배웠다. 오가는 길에 파리에 들러서는 아버지의 친구였던 유명한 경제학자 세이의 집에서 며칠 묵기도 했다. 거기서 밀은 자유당의 여러 지도자들을 만났고, 또 생시몽과 같은 파리의 저명인사도 만났다. 밀은 교육과정은 베인 이 쓴 전기를 통해서 이미 당대에 출판된 바 있는데, 이를 보면 8살에서 13살에 이르는 동안에 밀이 [자서전]에 기록한 정도를 능가하는 성취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밀은 자신의 자서전에 아버지의 교육 방법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그 교수법은 한 사람의 사상가를 양성하기 위한 것으로는 빼어난 고안이었지만, 내 아버지만큼 치밀하고 정력적인 사상가가 시행해야 성공할 수 있는 종류였다. 심지어 그로서도 가시밭길을 뚫고 나가야 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비록 내가 주제에 강한 흥미를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내 개도 분명히 가시밭길이었다고 확언할 수 있다. 애당초 나로서 당장 터득할 수 없는 내용도 많았는데, 아버지는 그럴 때에 이치에 어긋나게 속상해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다. 하지만 전반적으로 그의 방법은 옳았고 성공을 거뒀다. 아버지가 논리학과 정치경제학을 내게 가르친 방법만큼 철저했거나 소양을 기르는 데 적합했다고 할 수 있는 과학적 교육은 전례가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내가 스스로 찾아내게 함으로써 내 능력을 활성화하려고 조금 지나칠 정도로 노력하는 일환으로 아버지는 설명을 먼저 해주지 않고 내가 목전에 봉착한 난점의 어려움을 완전히 느끼게 된 다음에 해줬다. 그리하여 논리학과 정치경제학이라고 하는 굉장한 학문에 관해서 당대에 알려진 모든 지식을 정확하게 전수해 줬을 뿐만 아니라, 나를 그 분야에 관한 독자적인 사상가로 만들었다. 나는 거의 처음부터 나름대로 생각을 가질 수 있었고, 아버지와 견해가 다를 때도 종종 있었다. 대부분의 경우 의견 차이는 사소한 문제에 관한 것이었고 또 결국은 아버지의 견해를 표준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지만, 나중으로 가면서는 때로 내가 아버지를 설득하여 세부 사항에서 의견을 수정하도록 한 경우도 있었다. 내가 이 말을 하는 까닭은 단지 나 자신이 아니라 아버지의 명예를 드높이기 위함일 뿐이다. 이런 사례는 아버지의 완벽한 솔직성과 교수 방법의 진정한 가치를 보여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