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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존 스튜어트 밀 2 ( 인물 )

by 평싸10 2024. 2. 22.


밀은 경험주의 인식론과 공리주의 윤리학, 그리고 자유주의적 정치 경제사상을 바탕으로 현실 정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하원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그의 공리주의는 대부이자 스승이었던 벤담으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지만, 여기에 생시몽주의와 낭만주의를 가미해서 나름의 체계로 발전시켰으며 저술로는 [논리학 체계] [정치경제학원리] [자유론] 등 서른세권으로 된 전집을 남겼고 그 외에도 동인도회사에서 일하면서 집필한 수많은 보고서를 남겼다.

-생애

1823년 친구들과 함께 공리주의자 협회를 만들었고 밀은 옥스퍼드 대학이나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공부하기를 거절했다. 왜냐하면 그러기 위해서는 잉글랜드 국가교회인 잉글랜드 성공회 신자가 되어야 하는데, 밀은 잉글랜드 성공회를 '하얀 악마'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대신에 밀은 그이 아버지를 따라 영국 동인도회사에서 1857년까지 35년 동안 근무하면서 연구와 저술에 몰두하였다.

이와 같은 집중적인 학습은 밀의 정신건강에 좋지 않은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21살에 밀은 신경쇠약으로 고생하게 된다. [자서전] 제5장에서 스스로를 설명한 바에 따르면 이는 보통 아이처럼 자랐다면 자연히 발달하기 마련인 여러 감정을 억누르고 오로지 공부에만 매달리면서 몸과 마음 모두에서 엄청난 끈기를 발휘해야 했기 때문에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마르몽텔의 [어느 아버지의 회상]과 윌리엄 워즈워스의 시에서 위안을 찾아 정서 능력이 회복되면서 우울증은 결국 사라졌다. 이를 밀은 '구름이 점차로 걷혔다'라고 표현했다.


1843년 그의 중요 저서인 [논리학 체계]거를 발표하였는데 이는 베이컨이 이룩한 귀납법의 논리를 완성한 것으로 진보가 빠르고 가장 정확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자연 과학 연구의 방법론으로서 획기적인 저술이었다.


밀은 종교 그 자체에 대해 비판적이었는데 그[자서전]에서 그의 아버지 제임스 밀의 종교관을 언급하였다. 제임스 밀은 계시 신앙과 자연종교 등을 일절 거부하였으며 종교 자체를 도덕의 최대 적으로 보았다. 아버지의 영향을 받은 밀은 신앙을 가져본 적이 없었으며, 기독교 교리 자체를 부정하였다. 그 당시 상황에 기독교를 부인하는 것은 금기시되었으므로 종교에 관한 공개적 언급을 피하였다. 밀에 종교는 자유의 최대 적이었다. 그는 '편협하고 무지한 사람들이 종교의 부활을 자랑하지만 사실 지독한 편견의 부활과 다름없다'라고 말하였다.

밀은 1865년에서 1868년까지 세인트 앤드루스 대학의 학무위원장으로 선임되었고 같은 기간에 런던 웨스트민스터 선거구에서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하원에서 밀은 주로 자유당과 연결되어 활동하였는데, 아일랜드의 부담을 덜어주자고 주장했고 여성의 권리를 강력하게 옹호했으며, 비례대표제, 노동조합, 농지의 협동조합식 조직 등, 각종 사회개혁을 주장했다. 1869년에는 의회 안에서는 최초로 여성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의 정부론]에서는 비례대표제, 선호투표제, 참정권 확대 등, 의회와 투표제도의 개혁을 촉구했다. 버트런드 러셀이 1872년에 태어났을 때 러셀의 모친은 밀에 대부를 맡아달라고 요청해서 그렇게 되었다. 프랑스의 아비뇽에서 1873년에 사망했고, 아내 곁에 묻혔다.

밀은 21년 동안의 교제 끝에 1851년 해리어도 테일러와 결혼했다. 해리어 트는 그들이 만났을 때 이미 결혼한 유부녀였고, 따라서 그녀의 첫 남편이 죽기 전까지는 두 사람의 관계는 정신적으로만 가까웠다. 해리어 트는 명석한 여성으로 밀에 친구로서나 아내로서 그의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같은 시기를 살았던 강정 일당 부부가 서로를 학자로서 존중한 것처럼, 스튜어트 부부도 서로의 지성을 존중했다. 밀이 해리어 트기와 친분을 쌓으면서 여성의 권리를 옹호하는 입장이 더욱 강해졌다. [자유론]은 그녀가 죽은 직후에 출간되었는데 그녀의 영향 아래 많은 수정이 이루어졌음을 밝히고 있다. [여성의 종속]에서도 해리어들의 영향은 암시적으로 언급된다. 해리어 트는 밀과 결혼한 지 겨우 7년이 지난 1858년 밀이 동인도회사에서 사직하고 모처럼 자유롭게 둘이 프랑스를 여행하던 도중에 아비뇽에서 폐충혈로  사망했다. 밀은 해리어 트는 거기에 묻고, 조그만 집을 사서 여생의 안식처로 삼았다.

-업적
표현의 자유가 진보로 이어진다는 믿음은 공론의 여과능력을 신뢰했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의견이 진실로 틀렸거나 해롭다면 공론장에서 자연히 틀렸거나 해로운 것으로 판명이 나서 도태되리라는 말이다. 밀은 정부를 전복하려는 기획이나 살인을 정당화하는 이론일지라도 표현에 사회적 박해나 정치적 탄압이 가해지면 안 된다고 주장했다. 정부 전복이 진실로 필요하다면 전복해야 할 것이고, 살인이 진실로 당당하다면 용인되는 것이 마땅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단, 의견을 공표하는 방식은 대중 연설이나 저술이어야지 다른 사람에게 직접 피해를 주면 안 된다. 이것을 일컬어 위해 원칙이라고 하는데, 예컨대 굶주림에 시달려 흥분한 상태의 군중을 상대로 곡물 도매상을 지목하면서 '여러분이 굶주리는 것은 저런 자들의 착취 때문'이라는 식의 표현은 안 된다는 것이다. 20세기 초 미국 연방대법원 판사 올리버 웬 델 홈스는 이를 기초로 '명백하고 현존하는 위험'이라는 기준을 세웠다. 깜깜한 극장에서 장난으로 '불이야'를 외쳐서 사람들을 공황에 빠뜨리고 다치게 할 정도의 위험이 거기에 해당한다. 반면에 듣는 사람들이 스스로 판단해서 받아들일지 배척할지를 선택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어떤 의견이나 이론도 표현이 가로막히면 안 된다는 원리다.

생시몽은 산업노동자들을 찬양했던 프랑스의 이상주의자였다. 생시몽의 분석에서 밝을 미래를 본 밀은 정체상태 역시 행복한 상태일 수 있다고 생각했다.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인류는 더 이상 돈에 연연하지 않을 것이며 부유하지 않더라도 행복할 수 있다고 전망했기 때문이다. 정체상태라는 이론적 모형에서 리카도는 수확체감, 시장철폐, 이윤 감소 등을 보았던 반면, 밀은 지상의 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신학적 주제들을 보았다. 밀이 개량한 공리주의에는 플라톤식 이상이 담겨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보자. 밀은 인간이 당좌차월이나 잔업 근무 같은 것보다 존엄, 고결, 정의 같은 가치에 더 관심을 기울일 날이 오기를 갈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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