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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레온하르트 오일러 (인물)

by 평싸10 2024. 1. 31.


레온하르트 오일러는 1707년 4월15일 스위스 바젤에서 태어나 1783년 9월 18일 76세의 나이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사망했다.

-생애
오일러는 1726년 음향의 전파를 다룬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1727년에는 파리 아카데미 문제 풀이 경연 대회에 참가해 2등을 하였으며, 이후 매년 열리는 이 상을 12번이나 수상하였다.

오일러는 스위스 바젤에서 목사인 아버지와 개신교 목사의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6명의 형제 중 장남으로 태어났으며 두 여동생과 한 남동생이 있었다. 오일러가 바젤에서 태어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스위스의 리센으로 옮겨 가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그곳에서 보냈다. 이후 베르누이는 어린 오일러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후 오일러는 바젤에서 정규 교육을 받았다. 13세에 바젤 대학교에 입학 허가를 받았고, 1723년에 르네 데카르트와 아이작 뉴턴의 철학을 비교한 논문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당시에 그는 자기 놀라운 수학적 재능을 알아본 요한 베르누이로부터 토요일 오후마다 개인 교습을 받았다. 하지만 오일러가 목사가 되기를 바랐던 부친은 그에게 목사에게 필요한 여러 언어들을 배우게 했다. 그러나 요한 베르누이가 오일러는 위대한 수학자가 될 운명을 타고 태어난 사람이라며, 부친을 설득했다.

-유년 시절
1734년 1월 7일, 오일러는 아카데미 김나지움 출신의 화가 게오르크 젤의 딸인 카타리나 젤과 결혼했다. 두사람은 네바강 옆의 집을 샀으며, 13명의 아이를 낳았지만 5명만이 살아남았다.

요한 베르누이의 두 아들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러시아 과학 아카데미에서 일하고 있었다. 하지만 1726년 7월에 니콜라스 베르누이가 충수염으로 사망하였고, 다니엘 베르누이가 수학/ 물리학부의 교수직을 승계하면서 공석이 된 생리학 교수직에 오일러를 추천했다. 오일러는 이 제의를 수락한 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것을 잠시 미루고 바젤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직에 지원하였지만, 탈락하였다.

표트르 2세가 사망한 후에는 여건이 나아져서, 오일러는 아카데미 내에서 승진하여, 1731년 물리학 정교수가 되었다. 2년 후에 이 곳의 검열과 외국인 적대에 실망한 다니엘 베르누이가 사직하고, 바젤로 떠났다. 오일러는 그를 대신해서, 수학부의 장이 되었다.

1727년 5월 17일에 오일러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했고, 그는 곧 의학부의 조교수에서 수학부의 교수로 승진하게 된다. 그는 다니엘 베르누이와 같은 집에서 살았으며, 공동 연구 작업도 활발하게 했다. 오일러는 러시아어를 익히며,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정착했다. 그는 러시아 해군의 의무관도 겸임하기도 했다.

이에 재정 지원을 아끼지 않던 예카테리나 1세는 오일러가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도착한 날에 사망하는 바람에 표트르 2세가 왕위를 승계하게 되었다. 하지만 표트르 2세는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족들이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 왕족들은 아카데미의 외국인 과학자들을 신뢰하지 않아서, 예산을 삭감하는 바람에 오일러와 동료들이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표트르 대제가 세운 이 아카데미는 교육을 통해서 서유럽과 러시아의 과학 격차를 줄이는 것이 목표였다. 아카데미는 풍부한 재정과 표트르 대제와 귀족들의 장서들을 모아 놓은 큰 도서관을 갖고 있었다. 학생들의 수는 매우 적었으며, 연구에 중점을 두어서 교수들에게 시간과 자유를 주었다.

-생애
러시아에서 수학을 연구하는 동안 오일러의 시력은 점차 악화하였다. 
고열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긴 지 3년이 지나고 1738년에 그의 오른쪽 눈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의 시력은 독일에 있는 동안 더 악화하였고, 그런 오일러를 프리드리히 대왕은 키클롭스라고 부르며 놀리기도 하였다. 1766년에는 왼쪽 눈에 백내장이 발병하였고, 수술이 실패하여 왼쪽 눈마저 거의 보이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오일러는 이에 굴복하지 않고 뛰어난 암산 및 암기 실력으로 연구를 계속하였는데 일례로 그는 약 1만3천 행에 달하는 베르길리우스의 아이네이스를 처음부터 끝까지 암송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는 조수의 도움을 받으며 연구를 계속하여 시력이 좋았을 때보다 더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1775년에는 매주 평균 한 편에 달하는 논문을 작성하였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그 많은 책을 집필하면서 그렇게 내용도 잘 쓸 수 있는 거죠?'라고 질문하자 '아, 그거요? 사실 내 펜이 나보다 더 똑똑하거든요'라고 얼굴을 붉히면서 말했다는 일화가 있다.


-응용수학
오일러는 실제 세계에서의 문제를 분석적으로 해결하는 것과 베르누이 수, 푸리에 급수, 오일러수, 자연로그의 밑, 원주율, 연분수와 적분 등을 응용하는 데에 기여하였다. 그는 물리 문제에 미분을 쉽게 적용하도록 발전시켰고, 오일러 근사로 알려진 적분의 수치 근사를 개선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잘 알려진 오일러 근사로는 오일러 방법과 오일러- 매클리론 공식이 있다. 오일러는 또한 오일러-마시기로 네 상수를 도입하여 미분방정식의 사용을 용이하게 하였다.

오일러는 수학자, 물리학자, 천문학자, 논리학자, 공학자이다. 그는 미적분학, 그래프이론, 위상수학, 해석적 수론 등 수학의 여러 분야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으며, 함수 기호를 처음 도입하였다. 또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공식이라고 불리는 '오일러 항등식'을 구안하기도 했다. 고전역학, 유체역학, 광학, 천문학 및 음악 이론에서도 여러 업적을 남겼다. 18세기의 가장 저명한 수학자이자, 가우스, 탈레스, 아르키메데스 등과 함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수학자 중 한 명으로 꼽을 수 있다. 약 92권의 전집과 866편에 달하는 논문을 남겨 다른 어떤 수학자보다 이 분야에서 많은 연구 업적을 남겼다. 그는 대부분의 일생을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와 프로이센의 수도 베를린에서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