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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인물)

by 평싸10 2024. 2. 1.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은 1889년 4월 26일 노 이발 데크에서 태어나 1951년 4월 29일 케임브리지에서 사망했다.

- 생애

1903년까지 비트겐슈타인은 집에서 가정교육을 받은 후 린츠에 있는 린츠 국립실업고등학교에 3학년으로 편입하였다. 비트겐슈타인 보다 6일 생일이 빠른 아돌프 히틀러가 1년간 비트겐슈타인과 같은 학교에 다녔다. 아돌프 히틀러와 비트겐슈타인이 서로 알던 사이였는지는 알려진 바가 없으나 양측 모두 이와 관련하여 어떠한 회고도 없는 것으로 보아 일면식도 없는 사이였으리라 추정된다.

비트겐슈타인은 1905년 하늘을 나는 문제를 해결한 영웅과 천재들의 이야기가 들어있는 루트비히 볼츠만의 선집을 읽고 볼츠만에게서 물리학을 배우려고 했으나 볼츠만은 1906년 생을 자살로 마감하였다.

학교생활 동안 비트겐슈타인은 높은 톤의 어투에 약간 말더듬이가 있었고 우아한 옷을 입은 민감하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심중으로만 생각하는 학생이었다. 동급생 대부분이 비트겐슈타인의 이런 점을 특징으로 꼽았으며, 비트겐슈타인은 '선생', '헤어 루트비히'와 같은 별명으로 불렸다.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우울증에 따른 자살 경향을 보였다. 장남인 한스는 네살 때 작곡할 정도로 신동이었으나 1902년 쿠바의 아바나에서 자살했다.
뒤를 이어 삼남 루돌프가 1904년 베를린에서 자살하였고, 차남 과일은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가던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군의 총 퇴각이 결정되자 자신이 지휘하던 진중에서 총을 이용해 자살하였다. 루트비히도 청년 시절 줄곧 자살 충동에 시달렸고, 러셀로부터 천재로 인정받은 후에야 마음의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예술가와 지식인을 존중하는 집안 분위기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비트겐슈타인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둘 다 고등교육을 받았고 음악 같은 예술을 사랑하였다. 제철 사업가로서뿐만 아니라 예술 애호자로서도 유명했던 차를 비트겐슈타인은 오귀스트 로댕, 구스타프 클림트 같은 예술가를 후원하였고 빈 분리파 전시관을 설립하려는 재정을 책임지기도 하였다.

1906년 베를린에서 기계공학을 배우기 시작한 비트겐슈타인은 갈릴레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파우스트도 베란 쳐 같은 사람들이 남긴 르네상스 시기 작업에 흥미를 느꼈다. 1908년 맨체스터 빅토리아 대학교에서 항공과 관련한 논문으로 공학 박사 학위를 받은 비트겐슈타인은 공학 연구소의 연구생을 등록되어 대기권 상층에 연을 띄우는 연구를 하였고 작은 제트 엔진에 사용될 프로펠러를 제작하였다. 맨체스터에서 연구 생활하는 동안 버트런드 러셀과 앨프리드 노스 화이트헤드가 공저한 [수학 원리] 고틀로프 프레게의 [산수의 근본 법칙]을 읽고 수학기초론에 흥미를 느꼈다. 1911년 여름에 비트겐슈타인은 프레게를 방문한 후부터 연락을 자주 교환했고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버트런드 러셀에게서 배우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태어나 아버지 차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 손꼽히는 부자였고, 어머니는 레오 풀지네 비트겐슈타인이다. 
비트겐슈타인은 8형제 중 가운데 막내였고, 할아버지와 할머니인 헤르만 크리스티안과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대인이었으나 개신교로 개종을 하였고 1850년에는 작센에서 빈으로 이주하였다. 할머니 파니 비트겐슈타인은 유명한 바이올린 연주가인 요제프 요아힘의 사촌으로 아버지 차를 비트겐슈타인은 제철업을 하여 아주 큰 돈을 벌었다. 1880년대 후반 에는 차를 비트겐슈타인은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에서 독점적으로 하는 제철 사업가이자 세계에서 뛰어난 부자가 되었다. 차를 비트겐슈타인의 자산은 부동산, 주식, 귀금속, 외화 형태로 스위스, 오스트리아, 네덜란드, 북미 등지에 분산되어 있었다. 재산이 분산되어 있었기에 막대한 인플레이션이 일어난 뒤 이게도 부를 유지할 수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어머니인 레요 폴 뒤네  칼 무스는 유대인 아버지와 천주교 신자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노벨상을 받은 프리드리히 하이에크의 이모이기도 하다. 이런 가족력에 따라 비트겐슈타인의 가족은 개신교와 천주교에서 세례받았는데, 다른 형제들은 침례교를 신중하였고 비트겐슈타인은 할머니의 신앙을 따라 천주교 세례를 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논리 실증주의와 일상 언어 철학에 영향을 끼쳤고 분석 철학을 대표하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논리 철학 논고]로 대표되는 전기와 [철학 탐구]로 대표되는 후기로 나뉜다. [논리 철학 논고]에 나타난 전기 사상이 명제에 사용된 낱말의 은유다운 관계를 분석하여 기존 철학에서 잘못된 개념 탓에 빚어진 논리에 상충하는 점을 지목하는데 집중된 반면 후기 사상은 언어, 놀이에서 상호 변환되는 자연 언어가 논리에 부합한 구조로 정형화한 언어와는 다른 의미가 있다는 점을 역설하는 데 중심이 놓여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단어의 의미는 주어진 언어, 놀이 안에서 그 단어들이 사용될 때 가장 잘 이해된다'라고 주장하였는데 이것은 비트겐슈타인의 후기사상을 대표하는 말이다. 

20세기 말 한 철학 포럼이 정리한 세기를 대표하는 철학에서도 비트겐슈타인의 [논리 철학 논고] 와 [철학 탐구]는 상위 5위권에 모두 선정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은 후일 인문학과 사회 과학의 여러 방면에 영향을 주었고, 예술가들에게도 전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