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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3 ( 인물 )

by 평싸10 2024. 2. 3.


- 1920년 교사 시절 생활
비트겐슈타인은 교사 생활을 하면서 아이들을 이롭게 하려고 42쪽으로 된 철자와 발음이 표기된 사전을 발행하였다. [어린이를 위한 사전]은 논고를 제외하면 비트겐슈타인 생전에 그의 이름으로 출판된 유일한 책이다. 이 사전은 1926년 빈에서 출판되었고 휠 더 피 흘러 템퍼 스키의 간단한 서문이 들어있다. 이 사전의 초판은 2005년 2월 경매에서 판매 되었다. 교사 생활 하면서 체벌 문제에 휩싸인 비트겐슈타인은 1926년 4월 11살 소년을 심하게 때렸다는 이유로 고발당하였고 결국 교사 생활을 그만두게 되었다. 교사를 그만둔 후 비트겐슈타인은 빈에서 잠시 머문 후 휘텔도르프 자비의 형제 수도회에서 정원사로서 일하였다.

1920년이 되자 비트겐슈타인은 다른 사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랐다. 끔찍한 전투를 경험한 제 1차 세계대전 이후 견고해진 비트겐슈타인의 지성과 감성은 '논고'로 집약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작업으로 철학의 모든 문제에 대답을 구했다고 생각했기에 철학을 떠나 오스트리아의 초등학교에서 교사 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톨스토이의 [요약 복음서]를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아버지에게서 물려받은 막대한 유산은 형제들에게 나눠주고는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살기 위해 하스바흐, 오테를 탈, 트라 텐 바흐와 같은 곳의 산골 초등학교를 돌면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러나 보수적인 농촌 학부모들 및 동료 교사들과 불화를 일으켜 교사 생활은 순탄치 못했다.

논고를 번역한 프랭크 램지가 1923년 가을 비트겐슈타인의 편지에 적힌 주소를 찾아갔을 때 대 비트겐슈타인은 매우 검소하게 생활하고 있었다. 좁다란 텅 빈 방에 침대가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작은 테이블과 난로가 고작이었다. 프랭크 램지는 저녁 식사로 질긴 빵 하나와 버터와 코코아 한잔을 건네받았다. 비트겐슈타인은 아침 여덟 시에서 정오나 오후 한 시까지 수업하였고 오후 시간은 자유롭게 보냈다.

비트겐슈타인은 모리츠 슐리크와 만난다. 슐리크는 빈학파를 이끌고 있었다. 비트겐슈타인의 '논고'는 빈학파의 논리실증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주었다. 슐리크는 자신은 빈학파의 논의에서 비트겐슈타인의 사상을 계승하였다고 한 적이 없으나 프리드리히 바이스만 과 같은 빈학파의 학자들은 비트겐슈타인과 철학에 기초한 주제를 화제로 하여 자주 대화했다. 슐리크와 빈학파의 회원들이 자신의 [논고]를 오해한다고 생각하여 자주 좌절한 비트겐슈타인은 종교에 딸린 생활과 신비에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신념이 있다고 생각하였고 논리실증주의는 이러한 것을 쓸모없는 것으로 비하한다고 간주했다. 한 모임에서 비트겐슈타인은 라빈드라나트 타고르의 시를 돌아가면서 낭송하는 사이 자신의 책 언급을 거부하여 좌중을 짜증 나게 하였다. 이런 일이 있었어도 비트겐슈타인은 모임에 참석하였으며 철학에 다시 관심을 가졌다. 모임이 이어지는 동안 프랭크 램지가 [논고]와 관련해 토론하려고 빈을 방문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토론을 통해 프랭크 램지가 자신의 [논고]를 오해한다고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되었다.

1926년 비트겐슈타인은 누나인 그레텔을 위해 새 집을 구상하였다. 건축은 전쟁 중에 친구가 죈 파울 엥겔만이 진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과 파울 엥겔만은 참호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었다. 파울 엥겔만은 새 집이 아들로 루스 이후 현대 건축을 나타내는 공간으로 자리 잡기를 바랐다. 비트겐슈타인은 이 집을 짓는 일에 온통 매달렸고 창틀, 문, 난방기 같은 것까지 일일이 살펴보았다. 문손잡이와 난방기는 직접 설계하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의 요구로 모든 창문에 150kg에 이르는 금속 차광막을 달았다. [비트겐슈타인의 건축]을 쓴 버나드 가이트너는 이 건축물이 건축사에서 다른 예를 찾기 힘든 독특한 것이라 평가하면서 ' 이 집은 비트겐슈타인의 의도로 매우 정교하게 지어졌다. 모든 철제는 바닥을 숨겨져 있도록 하였다'라고 기술하였다. 집이 거의 완공되었으나 비트겐슈타인은 천정의 높이를 30mm 더 높이라고 하였고, 그가 원한대로 천정을 높이고서야 마침내 완공되었다.


-케임브리지 대학에 복귀
1929년 비트겐슈타인은 프랭크 램지와 다른 사람들의 간곡한 권유로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복귀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이 도착한 기차역에는 잉글랜드의 지식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철학자를 보려고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런 환대에도 비트겐슈타인은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학위를 받지 못했다. 버트런드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논고]를 집필하여 이미 철학 박사의 충분한 자격이 있다고 기록하였고 무어와 함께 박사학위 심사를 진행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심사관이 된 두 오랜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얻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논고를 ] 절대로 이해 못한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일각에서는 비트겐슈타인이 정치적으로 좌파적 입장을 가졌다고 평가한다. 비트겐슈타인 스스로가 자신이 '심장에서부터 공산주의자'라고 말한 적이 있고 많은 방면에서 노동자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응을 보이기도 하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도덕적 성찰이 없다는 이유로 과학적 방법을 혐오하였으며, 음악취향은 보수적이었고, 핵무기의 사용에 반대하였다. 오스트리아 철학자 오토매틱 바이 링거를 존경한 비트겐슈타인은 바이 링거의 이론을 복사하여 케임브리지 대학교에 배포하기도 하였다. 오토매틱 바이 링거처럼 비트겐슈타인도 민족성과 성적 지향으로 말미암아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었다. 1930년대 초반 기록된 MS 154와 같은 노트에는 자신의 정체성으로 말미암아 자책하는 여러 문구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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