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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공자 2

by 평싸10 2024. 1. 19.

-정치활동
공자는 국정을 쇄신하기 위해 방자하게 권세를 휘두르는 계속 사를 타도하려고 여러모로 계책을 꾸몄으나 일이 성사 단계에 가서 실패하고 말았다. 그 때문에 계속 사의 미움을 받은 공자는 기원전 496년에 노나라를 떠나 수십 명의 수행 제자들과 함께 자신의 학문적 이상을 현실정치에서 실현해 줄 어질고 현명한 군주를 찾아 기약 없는 여정에 나섰다.

공자의 인망은 해를 더할수록 거듭 높아져 기원전 499년에는 대사고(현재의 법무부 장관) 벼슬에 기용되었고 최초 재판관 및 외교관직도 겸하게 되었다.

이 무렵, 공산 불 새는 삼환과 계속 사의 전횡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다. 공자 역시 삼환 등의 무리를 몰아내 어지럽혀진 노나라를 바로잡으려고 이미 일을 꾀했던 데다 도덕 정치 구현에 대한 열망 때문에 반역자 공산 불 새가 하극상을 벌인 처지임에도 그가 초빙했을 때 이에 응하는 문제를 놓고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노나라 출신 제자였던, 맹의 자, 남궁도 등의 만류와 때마침 벌어진 상황 여건의 괴이한 변화로 인해 결국 단념하였다.

무려 10여년이 넘게 걸린 이 주유열국의 기간은 성인인 공자로서도 참기 어려운 고달픈 세월이었다. 이 무렵 공자는 생명에 위협이 가해지는 위험에 빠지기도 하였으며 그 같은 봉변으로 인하여 여행 도중 만난 은자들에게 수모와 조롱을 당하기도 하였다. 
공자의 도덕 정치는 어는 나라에서도 외면당했다. 당신의 왕들은 더디더라도 올바른 길을 택하기보다 손쉽게 국력을 팽창시켜 천하를 제패할 부국강병의 방법만을 원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순장될 뻔한 아이를 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그때까지 이어져 오던 순장의 악습을 왕에 관하여 끝내 폐하였다. 또 제나라 경동과의 회동에서 뛰어난 지략과 용기로 전쟁 한번 치르지 않고 단지 협상만으로 노나라가 잃었던 옛 땅을 되찾는가 하면, 당시 권세가였던 삼환씩의 횡포를 꺾기 위해 그들의 요새인 삼성을 허무는 계획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은 계속 사의 저항으로 도중에 중단되고 말았다. 계속하는 노나라 삼환 계속, 맨손, 숙손 가문을 이끄는 수장이었다.

공자는 마침내 자신의 학문적 이상이 당시의 정치 상황에서는 결코 실현될 수 없음을 깨닫고 제후와 군주들을 설득하는 일을 단념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귀국 후 후학양성에만 전념하기로 결심하고 미래 세대에는 남은 희망을 모두 걸게 되었다. 이로써 공자의 정치적 삶은 마감되었고 이후에는 교육자로서의 본격적인 삶이 시작되었다.

-생애 후반
공자의 말년에 아들이 백서가 50세의 나이로 죽었다. 또 특히 아끼던 제자 안 연과 자로마저 잇따라 죽었다. 이때 공자는 '하늘이 날 버렸다'라며 비통함을 감추지 않았다.

아들 백서가 사망하자 공작가 어린 손자를 키웠다. 그의 손자인 자사는 훗날 공자의 뛰어난 제자 가운데 한 사람인 증자를 스승으로 모시고 그의 문하에서 배워 조부인 공자의 사상과 학맥을 훌륭히 이어 나갔다.

인에 기반한 도덕 정치를 실현하고자 전국을 돌며 군주들을 설득하였지만, 오직 부국강병책으로 천하통일만을 노리는 당시의 세태에서는 공자의 이 상을 받아 주는 제왕이 아무도 없었다.

공자는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그는 중국의 오래된 전통적 경전들을 제자들에게 가르쳤다. 공자가 교육에 활용한 경전은 '육예' 또는 '육경'이라 불리는 '역' '시' '서' '예' '악' '춘추' 이다. 당시 육경은 진귀한 서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공자는 속수 이상을 예물로 가져온 이에게 가르쳐주지 않은 적이 없었다. 금문 학파는 공자가 육경을 창작했다고 주장하였으며, 구문 학파는 공자가 육경을 개설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공자 이전에도 육경의 이름들은 사서에 등장하지만 예술이 있고 난 뒤에야 단순한 점술서, 잡기의 영역을 뛰어넘을 수 있었다. 실제로 '춘추'를 비롯한 종래의 사관들 기록을 바탕으로 공자는 자신만의 독창적인 정치관인 정명론을 끌어내었고 맹자는 이를 '춘추의 대의만은 공자가 은연중에 취했고' 춘추를 정명으로 귀결시키면서 '난신적자를 두렵게' 했다고 평하였다.

아들과 아끼던 제자들을 잇달아 잃고 상심에 빠진 공자는 고향인 공부로 돌아와 후학 양성으로 말년을 보냈다.

공자는 말년 들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 나이 열다섯살에 학문의 길로 가기를 마음먹었고, 서른에 이르러 세상에 나의 존재를 알렸으며, 마흔에는 어떤 일에도 미혹됨이 없었고, 쉰살에 이르러서는 하늘의 뜻을 모두 알았으며, 예순살에는 모든 일에 대해 순리를 알 수 있었고, 일흔살에는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다."라고 말하였다.

공자는 73세가 되던 해에 기원전 479년에 제자들이 시켜보는 가운데 승하하였다. 공자가 세상을 떠난 후 제자들은 스승이 남긴 말들을 모아서 [논어] 책을 저술하였다.

공자의 문하에서는 걸출한 대학자가 무수히 배출되었는데 육경에 통달한 사람만 해도 무려 7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들을 가리켜 '칠십자'라고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학식이나 덕망, 재능이 출중하여 역사에 길이 이름을 남긴 열 사람의 제자를 가리켜 '공문 십 철' 이라고 한다. 이들은 안회, 민자건, 염 백은, 중궁, 재앙, 자궁, 영어 유치원, 자로, 자유, 자하 등이 있다. 공문의 많은 제자 중 안회의 학문과 덕이 가장 뛰어났다. 이는 스승인 공자와 동문 선후배 등이 모두 인정하는 바였다. 그러나 안회는 스승인 공자보다도 먼저 세상을 떠나 그를 크게 상심시켰다. 그의 학통을 후대에 전한 인물은 증자와 자궁이었다.

 

이들 중에서 증자는 공자의 손자인 자사를 가르쳤고, 훗날 맹자가 자사에게서 배웠으니, 맹자학파는 증자가 배출한 셈이다. 자궁의 손제자들 중에 한 분파는 순자와 한비자로 이어졌고, 이는 법가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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