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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이마누엘 칸트

by 평싸10 2024. 1. 23.


-생애
1724년 프로이센의 상업 도시 쾨니히스베르크에서 수공업자인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 11 명중 넷째로 태어났다. 
원래 칸트는 에마누엘 이라는 세례명을 받았지만, 히브리어를 공부하고서는 이마누엘로 이름을 바꾸었다.

칸트 부모는 청교도적 생활을 하였으며, 이는 칸트의 유년 시절에 깊은 영향을 끼쳤다. 칸트는 1732년 어머니와 친분이 있던 신학자 슐츠가 지도하던 사학교 프리드릭스 김나지움에 입학하고 1740년에 졸업했다. 같은 해 쾨니히스베르크의 대학에 입학하여 철학과 수학을 공부했는데, 특히 마르틴 크누센에게 논리학과 수학을 지도받았다고 한다. 이후 자연과학에 관심을 두었고 아이작 뉴턴의 물리학에 매료되었다.

그는 삶을 통틀어서 단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에서 100마일 이상 떨어진 곳으로 여행하지 않았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프로이센에서 가장 북쪽 도시인에 멜에서 이주한 독일인 마구 제작자였다. 그의 어머니는 뉘른베르크에서 태어났고 칸트의 할아버지는 스코틀랜드에서 동프로이센으로 이주한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전히 가족의 성을 영어식으로 쓰곤 했으며, 유년 시절의 칸트는 돋보이는 학생은 아니었으나, 아주 성실한 학생이었다.
그는 경건주의를 따르는 가정에서 성장했다. 기독교의 경건주의는 종교적인 헌신과 겸손함 그리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것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칸트가 받을 교육은 수학과 과학보다 라틴어와 종교였고, 엄격하고 가혹한 훈련을 강조한 것이었다.

10여년간 철학적 침묵기를 거친 후 칸트는 1780년대에 일련의 중요한 저서, 즉 에세이 [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 1784] [윤리 형이상학의 정초,1785] [자연과학의 형이상학적 기초,1786] 을 잇달아 발표하면서 점점 명성일 올라갔다. 그리고 [순수 이성 판단,1781] [실천이성비판, 1788] [판단력 비판,1790] 에서 그의 비판철학의 정수를 선보였다. 눈부신 학문적 성취와 더불어 1786~1788년에는 쾨니히스베르크대학의 총장에 선출되는 영예를 누렸다.

후대 전기 작가 기록에 의하면, 칸트는 1746년 [활력의 진정한 측정에 관한 사상]이라는 졸업논문과 함께 대학을 졸업했으나, 아버지가 사망함에 따라 학자금과 생계유지를 위해 수년에 걸쳐 지방 귀족 가문의 가정교사 생활하면서 홀로 철학 연구를 계속했다고 한다. 
그러나 칸트는 곧 대학으로 돌아왔으며 1755년 6월12일 [일반자연사와 천체이론]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음과 동시에 [형이상학적 인식의 으뜸가는 명제의 새로운 해명]이라는 논문으로 대학에서 강의할 자격을 얻었다. 이후 대학에서 일반 논리학, 물리학, 자연법, 자연신학, 윤리학 등 여러 주제로 강의했다. 1756년 크누센이 사망하자 그 후임으로 교수직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렇지만 1764년 프로이센의 교육부에서 제공한 문학 교수 자리를 거절할 정도로 철학 교수직을 갈망했다. 18세기 까지도 수학과 물리학은 자연철학으로 간주하여 철학 영역에 속했다. 1766년에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 왕립 입고서 관 사서로 취직하여 1772년까지 근무하기도 했다. 그 사이 칸트는 원하던 대로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철학 교수직을 얻었으며 발표한 교수 취임논문은 칸트 비판 철학의 시작을 알리는 저술로 평가되고 있다.

-칸트는 한 번도 쾨니히스베르크를 떠나지 않았으며, 알려진 것처럼 규칙적인 일상생활을 영위하면서 강의와 사유에 전념했다. 다만 1792년에 논문출판과 검열을 두고 학부 관리처와 작은 의견 충돌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제의 논문은 [인간 본성에 있어서의 근본악에 관하여] 한 제목으로 당시의 계몽주의 사상과 
종교에 관한 칸트의 솔직한 견해가 대학 관리처로부터 경고를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평생 독신으로 살며 커피와 담배를 즐겨하던 칸트는 1804년 2월 12일, 80세를 향년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는 마지막 유언으로 "그것으로 좋다"라는 말을 했다.

-칸트는 21세기의 철학에 까지 영향을 준 새롭고도 폭 넓은 철학적 관점을 창조했다. 그는 또한 인식론을 다룬 중요한 저서를 창간했다. 종교와 법, 역사에 관해서도 중요한 책을 썼다. 그의 탁월한 저서 중 하나인 [ 순수이성 비판 ]은 이성 그 자체가 지닌 구조와 한계를 연구한 책이다. 이 책에서 칸트는 전통적인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공격하고 있으며, 칸트 자신이 그 분야에 공헌한 점을 부각하고 있다. 그가 만년에 출간한 다른 주요 저서에는 윤리학을 집중적으로 다룬 [실천이성 비판]과 미학, 목적론 등을 연구한 [판단력 비판]이 있다.

그는 종래의 경험론 및 독단론을 극복하도록 비판철학을 수립하였다. 인식 및 실천의 객관적 기준을 선험적 형식에서 찾고 사유가 존재를, 방법이 대상을 규정한다고 하였다. 도덕의 근거를 인과율이 지배하지 않는 선험적 자유에서 찾고 완전히 자유로운 도덕적 인격의 자기 입법을 도덕률로 삼았다.

칸트는 근대 계몽주의를 정점에 올려놓았고 독일 관념 철학의 기반을 확립한 프로이센의 대표 철학자이다.

-칸트의 제자 요한 헤르더는 그의 스승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한다.
사고를 위한 이마는 침착한 유쾌함과 기쁨의 자리였다. 풍부한 사상이 넘쳐흘렀고 농담과 재치가 장기였다. 알만한 가치가 없는 것에 대해서는 무관심했다. 어떤 음모나 편견 그리고 명성에 대한 욕망도, 진리를 빛나게 하는 것에서 그가 조금이라도 벗어나도록 유혹하지 못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스스로 생각하도록 부드럽게 강요했다. 내가 최고의 감사와 존경을 다해 부르는 그의 이름은, 이마누엘 칸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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