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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공자 1

by 평싸10 2024. 1. 19.


-공자는 기원전 551년 노나라 취푸에서 좀 떨어진 시골인 창평행 추 읍에서 부친 숙량흘과 부친이 60대 후반에 맞은 세 번째 아내인 안정제 사이에서 태어났다.
공자의 조상은 주나라 이전 왕조인 은나라에서 봉토를 하사받은 송나라의 공족이었으며 공자 3대 전에 노나라로 왔다. 그의 집안은 송나라 왕실에서 연유한 명문 가문이었으나 몰락하여 노나라에 와서 살았으며, 부친 숙량흘은 무사였다. 일선에 따르면 모친 안 징 재는 낮은 신분의 무녀였다고 한다.
공자 자가 중이인 이유는 집안의 장남인 맹 피에 이은 둘째 아들이라는 뜻이었다. 흔히 소개하는 공자 가계는 보통 그의 부친 숙량흘과 증조부 공방 속까지 언급하나, 후대에는 보통 공자를 시조로 간주하기도 한다.


-공자의 소년 시절을 이야기 하자면 공자가 3살 때 아버지가 죽었고, 어머니 안 징 재가 공부의 권리로 이사하여 홀로 공자를 키웠다. 공자는 사생아였기 때문에 공 씨 집안에서 숙량흘의 자손으로 인정 받지 못하여 숙량흘의 재산은 이복형제누이들과 이복 조카에게 상속되었고, 그의 몫으로 돌아온 것은 없었다. 모친마저 눈이 멀어버려 생활 형편은 더욱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공자는 어려서부터 거칠고 천한 일에 종사하면서 곤궁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사생아였던 공자는 자신의 대부였던 숙량흘의 자손, 즉 귀족임을 인정받는 것이 필생의 목표였다. 무사였던 아버지와 달리, 공자는 글과 지식으로서 인정받으려 했다. 어릴 적부터 제사 지내는 흉내를 내며 놀기를 좋아했고 고실, 즉 예로부터 내려오는 전통적 종교 의례, 제도, 관습 등에 밝았다.

30대가 되자 공자는 노나라에서 가장 박식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학원을 열어 학생들을 가르쳤다. 중국 역사상 최초의 학교를 창설한 것이다. 노나라의 유력한 대부의 자손에서 평민의 자제까지 '묶은 고기' 이상을 가져온 사람은 누구나 가르쳤다. 공자는 [주역] [서경] [시경] 등의 경전을 가르쳤다.

공자에게는 특별한 선생은 없었고, 그가 만날 수 있는 모든 사람에게서 배우려 하였다. 그 가운데 유명한 사람이 주나라의 주하나였던 노자이다. 공자가 노자를 찾아가서 배웠던 것은 여러 문헌에 나온다. 이런 사정을 만년에 공자는 '15살에 배움에 뜻을 두었고, 30살에 섰다, 고 술회한다. 대략 열다섯 살 때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여, 서른 살에는 학문의 기초가 섰으며, 생활의 토대가 섰으며, 한 인간으로서 우뚝 섰다는 것이다.

공자는 노나라에 살았다. 따라서 노나라를 건국했던 주공을 본받아야 할 사람으로 받들었다. 주공은 어린 성왕을 대신해서 섭정을 하면서 주나라의 봉건제를 수립했다. 봉건제는 종 법제라 한다. 천자가 형제 친척을 제후로 임명한다. 제후는 다시 자손을 대부로 임명한다. 그 결과 국가의 주요 기관장은 종친들이 된다. 이래서 종법이라 한다.
공자 당시는 종법과 봉건제가 무너지고 극심 혼란했다. 노나라가 바로 그런 상황이었다. 공자는 주공의 종 법제를 회복해서 노나라를 나아가 천하를 평화롭게 하고자 했다.

-관료 생활
본국인 주나라의 낙읍을 돌아보고 귀국한 후 그의 명망은 차츰 천하 각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에 따라 그에게 배움을 청하는 제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그 수가 훗날 삼천명을 넘어섰다. 이에 공자를 눈여겨 본 노나라의 왕 소송은 그를 가까이 두려 하였다.

회계 출납 직인 우리를 거쳐 목장 경영직인 사직 등으로 관리 생활을 시작하였고 공자는 30세에 이르러 관리로서 지위도 얻고 학문으로 더 많은 진전을 보여줬다.

공자의 정치관은 법보다 덕으로서 백성과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것이었고, 세상사를 처리함에 있어 사람을 가장 중시하는 인본주의를 주창하였다. 주공이 나라를 다스리던 시대처럼 올바르고 평화로운 인간 세상을 건설하는 것이 공자의 이상이었다.

-주유천하
공자는 제나라의 왕 공공과 신하들에게 여러모로 진리를 가르쳤다. 그는 그 곳에서 음악을 논하고 경동에게 정명주 위에 입각한 정치 이상을 말하였다. 공자의 박학다식함과 고매한 인품에 매료돼 그를 흠모하게 된 공공은 그를 자신의 정치적 고문으로 기용하려 했으나, 공자의 높은 학식과 덕망으로 인해 자신의 지위가 위 새로워지는 것을 꺼린 제나라 재상 안녕의 적극적인 반대로 좌절되었다.

이때 제나라에서는 밀지를 파견하여 노나라를 함정에 빠뜨리려 하였는데 공자가 이를 꿰뚫어 보고 회의 장소에 들어가려는 의심쩍은 사내를 붙잡아 화를 미리 막고 노나라에 유리하게 강화를 맺었다. 심환 씨의 세력을 꺾으려 했으나 실패하고, 대부의 계환지가 저 나라의 흉계에 속아 쾌락에 빠진 것을 만류하다가 대립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크게 낙담한 공자는 그의 큰 뜻을 이루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여 벼슬을 버린 후, 14년 동안 제자 들고 온갖 고초를 무릅쓰고 위, 정 등 여러 나라가 주요하였다.

이에 따라 2년 만에 귀국한 공자는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46세 무렵 노나라의 왕의 측근 배신인 양호가 세력을 잃고 물러나게 되면서 중도 재가 되었다. 52세 무렵에는 대사하게 지위가 올랐다. 그 이듬해 노나라의 정공을 따라가 참석한 제나라와의 강화 회의에서 예전에 제나라에 빼앗긴 노나라의 땅을 돌려 주도록 요구하여 이를 관철했으며, 나신 데부터 소정 묘를 축출하는 데 참여하였다고도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러한 일은 없다는 주장도 있다.

-공자 또는 공부하자는 유교의 시조인 고대 중국 춘추시대의 정ㅇ치가, 교육자이고 노나라의 문신이자 작가이면서, 시인이기도 하다. 흔히 유교의 시조로 알려져 있으나 어떤 관점에서 보더라도 유가의 성격이나 철학이 일반적인 종교들과 유사시 취급될 수 없다는 점에서 20세기 중반 이후에는 이처럼 호칭하는 학자는 거의 없다. 유가 사상과 법가사상의 공동 선조였다.

정치적으로는 삼황오제의 이상적 정치와 조카를 왕으로서 성실하게 보필한 주공 단의 정치 철학을 지향했다. 뜻을 펴려고 전국을 주요하였으나, 그의 논설에 귀를 기울이는 왕이 없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전념하다 생을 마쳤다. 춘추시대에 서주의 제후국인 노나라의 무관인 숙량흘의 둘째 아들이자, 서자로 태어났었다. 이름을 구, 자는 중 너이다.

-공자의 호칭에서 '자'는 성인을 부르는 존칭이다. 그 뒤 여러 번 추정되어 대성 지성 문선왕에 추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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