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철학

르네 데카르트 (인물)

by 평싸10 2024. 2. 5.


-르네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에 태어나 1650년 2월 11일에 스톡홀름에서 사망했다. 1644년 신플라톤주의와 스토아주의를 계승, 자신의 철학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라틴어로 [철학 원리]를 출판했다. 그 후로 데카르트는 여러 사람과 편지로 자기 생각을 전하곤 했는데 보헤미아의 왕 프리드리히의 딸 팔츠의 엘리자베스에게 최고선에 관한 자기 생각들을 편지로 보낸 것들이 모여 1649년 출판된 그의 마지막 책 된다. 1650년 2월 11일 폐렴에 걸려 54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1606년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래시 콜레주에 입학하여 1614년까지 8년에 걸쳐 철저한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게 된다. 졸업 후 네덜란드로 갔다가 30년 전쟁 때 독일에 출정했다. 1626년부터 2년 동안 수학과 굴절광학을 연구하며 미완성 논문 [정신 지도의 규칙]을 썼다. 1628년 말, 네덜란드로 돌아온 그는 다시 저술 활동에 몰두해 [세계론]을 프랑스어로 출판한다. 1637년에는 [방법서설]에 굴젉광학, 기상학, 기하학의 세 가지 부분을 덧붙여 익명으로 출판했다가 후에 프랑스어로 [방법서설]을 완성한다.

-생애
데카르트는 1596년 3월 31일 투엔 지방의 투르 인근에 있는 소도시 라에의 법관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1607년 허약한 체질 탓에 조금은 늦은 나이로 예수회가 운영하는 라 플래시 콜레주에 입학한다. 데카르트는 여기서 수학 과학을 처음으로 배웠는데,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이론도 함께 배웠다. 

그는 주변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해 어려서부터 조용한 곳에서 골똘히 생각에 잠기는 버릇이 있었다. 그의 부친은 그에게 철학가 기질이 있음을 발견하고 '꼬마 철학가'라는 별명을 지어 주었다. 부자의 관계는 그다지 좋지 않았는지 그는 스스로 형제 중에서 아버지가 가장 싫어하는 아이였다고 자주 얘기하고 다녔다. 그리고 형제들과도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했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그는 자주 집을 떠나 혼자 여행을 다녔고 친구들에게 마음을 쏟았다.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장난감 중에서 사팔뜨기 인형을 제일 좋아했던 데카르트는 커서도 유독 장애인들에게 호감을 보였다.

 데카르트의 선생님은 그를 똑똑하고 부지런하며, 품행이 단정하고, 내성적이지만 승리욕이 강하고, 수학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학교의 구시대적 교육방식에 불만을 참지 못하고 자신이 배운 교과서를 잡다한 지식의 쓰레기라고 비난을 퍼부었다.

1619년 11월 10일에는 울음 근로의 한 병영에서 자기 삶의 길을 밝혀주는 꿈을 꾸게 된다. 데카르트는 심각한 감기에 걸려 벽난로 안에서 문을 잠그고 잠에 든다. 거기서 3가지 꿈을 꾸게 되고, 성령이 자신에게 새로운 철학의 영감을 주었다고 믿게 된다. 첫 번째 꿈에서 데카르트는 심한 바람이 불고 있는 거리 한 모퉁이에 서 있었다. 그는 오른쪽 더라서 약하여 제대로 서 있을 수 없었는데 그 근처에는 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 있어 데카르트 자신이 그쪽으로 날아가 버렸다. 잠깐 눈을 떴다가 다시 잠에 빠져들었는데, 두 번째 꿈에서 그는 미신으로 흐려지지 않는 과학의 눈으로 무서운 폭풍을 지켜보고 있었다. 이 폭풍은 일단 그 정체가 폭로되고 난 후에는 그에게 아무런 해도 끼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그는 깨달았다. 세 번째로 꿈을 꿀 때는, 테이블 위에 사전과 그 옆에 다른 책이 놓여 있는데 [나는 어떠한 생활을 보내야 할 것인가?] 라는 글귀가 눈에 들어오며 낯선 사람이 그에게 다가와 [그는 이것을 인간의 지식과 학문의 참과 거짓이라 해석함]으로 시작하는 시를 보여주었다. 그는 세 번째 꿈에서 깨어난 후에 이미 꾼 꿈들의 의미를 생각하였는데 첫 번째 꿈은 과거의 오류에 대한 경고이며, 두 번째 꿈은 그를 사로잡은 진실의 정신이 내습한다는 것이고, 마지막 꿈은 모든 과학의 가치와 참된 지기에 길을 열 것을 명령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이 중 두 번째 꿈은 현대의학적으로는 폭발 머리증후군으로 이해된다.

그는 1614년까지 8년간에 걸쳐 철저하게 중세식 그리고 인본주의 교육을 받았다. 5년간 라틴어, 수사학, 고 전 작가 수업을 받았고 3년간 변증론에서 비롯하여 자연철학, 형이상학, 그리고 윤리학을 포괄하는 철학 수업을 받았다. 그가 이 시기에 받은 교육은 후에 그의 저서 여기저기에 흔적을 남기게 되는데 특히 [방법서설]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그이 아버지는 그의 식견을 높이기 위해 1617년 그를 다시 파리로 보냈다. 그러나 그는 화려한 도시 생활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수학과 관련된 도박만이 그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1617년의 어느 날 한가로이 길을 걷던 데카르트는 벽에 붙은 광고지를 발견했다. 호기심이 발동한 그는 무엇인지 확인하기 위해 광고지가 붙은 곳으로 다가갔다. 광고는 네덜란드어로 적혀 있어서 내용을 알 수 없었다. 그는 네덜란드어를 아는 사람에게 도움을 구하기 위해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행인을 발견한 데카르트는 광고에 적힌 내용을 물었다. 뜻밖에도 그 사람은 네덜란드 대학교 교장이었고 에케르트에게 광고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광고는 어려운 기하학 문제가 적혀 있었고 이 문제를 푸는 사람에게 사례하겠다는 내용이었다. 상황을 이해한 데카르트는 단지 몇 시간만의 문제를 풀었고 자신에게 수학적 재능이 있음을 발견했다.

데카르트는 라 플래시를 졸업하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푸아티에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대학에서는 수학, 자연 과학, 법률학, 스콜라 철학 등을 배우고 수학만이 명중한 지식이라고 생각하였다. 1616년 리 상승을 취득한 후 그는 세상이라는 커다란 책에서 실질적인 지식을 얻고자 학교 밖으로 나갔고, 다시는 제도권 교육으로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