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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르네 데카르트 2 (인물)

by 평싸10 2024. 2. 6.


- 연구가로서의 인생
1628년 겨울에 데카르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 아래 있는 프랑스를 떠나, 자유로운 학문 분위기가 지배적인 네덜란드로 이주했다. 네덜란드에서 암스테르담, 하여 렘, 에그몬트 등의 도시로 여러 차례 주거지를 옮기면서 더러는 개인 교사로 혹은 은둔 학자로 생활을 했다. 이 시기에 자연과학에 관한 책 [세계론] 을 집필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책에서 그는 코페르니쿠스와 갈릴레오 갈릴레이 가 주장한 지동설을 바탕으로 세계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진술했다.

1620년 제대하고 프랑스에 귀환, 1626년부터 파리에서 수학, 자연과학, 특히 광학을 연구하였다. 1627년 다시 종군한 후, 1628년 단편[정신 지도의 법칙]을 집필, 자신의 방법론 체계를 세우려 하였다. 같은 해 겨울 연구와 사색의 자유를 찾아 네덜란드로 건너가 철학 연구에 몰두하였다. [방법서설], [성찰],  [철학의 원리],  [정념론] 등은 네덜란드에 약 20년간 머물러 있는 동안에 저술한 것이다.

1637년부터 데카르트는 존재론과 인식론 문제에 몰두한 것으로 보이는데 이 해에 [방법서설]을 출판했다. 존재론과 인식론에 관한 연구 결과는 1641년 [제1 철학에 관한 성찰]이란 제목으로 출판하게 되었다.

- 사상
데카르트는 주체와 대상을 일치시키려 실체를 두 부분으로 나누었다. 바로 연장과 사유이다. 연장은 구체적인 부피와 같은 공간을 차지하는 실체를 말하고, 사유는 연장과 달리 부피와 같은 것이 없는 실체를 말한다. 데카르트는 인간을 연장과 사유가 함께 있는 것으로 보았다. 여기서 사유는 몸을 제어시키는 것으로 보았다. 또한 몸과 사유를 이어주는 부분을 송과선으로 보았는데, 데카르트 이후 철학자들은 이 송과선을 몸으로 볼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서 논란을 벌이기도 했다.

그는 학문 중에서 수학만이 확실한 것으로 철학도 수학과 같이 분명하고 명확히 드러나는 진리를 출발점으로 해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로 인해 그는 기존의 모든 지식을 의심하였는데, 그렇지만 최후의 의심할 수 없는 명제 '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에 도달, 이것이 철학의 근본 기초라고 설명하였다. 그 기계적 우주관은 18세기 프랑스의 유물론에 영향을 주었다. 그는 '근대 철학의 아버지'라고 불리며, 수학에 있어서는 해석 기하학을 창시하여 근대 수학의 길을 열어 놓았다.

데카르트는 본유관념과 인위 관념, 외래관념을 분리하였다. 여기서 외래관념은 밖에서 오는 관념을 말하고 인위 관념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만들어 내는 것을 말하며, 본유관념은 태어나면서부터 존재하는 관념을 말한다. 본유관념은 '삼각형의 꼭짓점은 세 개이다.' '면제의 면은 여섯개이다.'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두 평행선은 서로 만나지 않는다.'와 같은 것으로, 언제나 확실하게 참인 것으로 판단되는 것을 말한다. 덧붙여 에케르트는 신의 관념도 확실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존재론적 증명을 통하여 신이 있음을 증명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존재론적 증명은 나중에 칸트의 비판을 받았다.

데카르트는 수학자로서도 유명하지만 철학자로의 삶도 살았다. 데카르트는 가장 확실하고 의심할 여지가 없는 진리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택한 방법이 진리가 아닌 것들을 소거하는 것인데, 그 방법은 저서[방법서설]에 잘 나타나 있다. 데카르트는 확실한 진리를 찾으려 불확실하다고 생각하는 감각도 배제 했는데, 이는 감각도 반드시 맞는 것이라고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도달한 결론이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다. 이 결론에 도달한 것은 [방법서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전능한 악마가 인간을 속이려 한다고 해도, 악마가 속이려면 생각하는 자신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이는 [제일철학을 위한 성찰]에도 나와 있다. ) 이 명제는 근대 철학을 대표하는 명제이며, 데카르트 이후 근대 철학은 이 명제에 절대적인 영향을 받았다. 특히 데카르트가 사용한 관념이라는 개념은 칸트와 같은 철학자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종교
동시대의 블레즈 파스칼은 '그의 철학에서 데카르트를 용서할 수 없다. 데카르트는 신 없이 지내기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데카르트는 신에게 손가락 움직임 하나만으로 세계를 확립하라고 재촉하는 것을 피할 수 없었지만, 그 후에 그는 신을 더 이상 필요로 하지 않았다.

르네 데카르트의 종교적 믿음은 학계에서 엄밀히 논쟁 되어 왔다. 그는 목적들 중 하나가 기독교 신앙을 옹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독실한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것을 주장했다. 하지만 그의 시대에서 데카르트는 이원론 또는 무신론을 믿은 것으로 비난받았다. 그가 말년에 비교적 사상적으로 자유로운 스웨덴으로 활동무대를 옮긴 것 또한 이러한 종교적 신념을 비난받은 것과 관련 있다.

스티븐 고 크롬 저의 데카르트 전기에는 그가 죽는 날까지 진리를 발견하기 위한 단호하고 열망과 함께 로마 가톨릭교회에 깊은 종교적 믿음을 가졌다고 기술하고 있다. 데카르트가 스웨덴에서 죽은 후, 스웨덴 법에 의하면 지도자는 개신교도이어야 했기 때문에 크리스티나 여왕이 로마 가톨릭교회로 개종하기 위해서 왕위에서 물러났는데, 로마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그녀가 장기적으로 접촉한 사람은 개인 지도교사인 데카르트 뿐이었다.

주요 저서에는 [음악 개론], [정신지도 규칙], [자연의 빛에 의한 진리 탐구], [인간, 태아 발생론], [세계론], [방법서설], [기하학]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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