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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버트런드 러셀 ( 인물 )

by 평싸10 2024. 2. 14.


-러셀 백작 버트런드 아서 윌리엄 러셀은 1872년 5월 18일 웨일스 몬머스셔에서 태어나 1970년 2월 2일 9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러셀은 영국의 사회비평가이며 역사가, 수리 논리학자, 수학자였으며, 화이트헤드와 함께 [ 수학 원리 ] 을 썼으며 수리논리학의 성립에 공헌하였으며, 이후 평화주의 운동과 저술 활동에 참여하였다. 1950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1950년 러셀은 '인본주의와 양심의 자유를 대표하는 다양하고 중요한 저술을 한 공로를 인정받아' 노벨 문학상을 받는다.
그는 일생의 여러 부분에서 자유주의자, 사회주의자, 평화주의자 순으로 자신의 이상을 생각해 왔으나, 자신이 이 중 어느 쪽도 되지 않았다고 회고했다. 일생의 대부분을 잉글랜드에서 보냈으나, 그는 웨일스에서 태어났고 그곳에서 사망했다.

러셀은 당시 반전 운동가로서 크게 활약했다. 그는 자유 무역을 지지했으며, 반제국주의 운동가로 활약했다. 러셀은 1차 세계대전 때 반전 운동으로 인해 감옥에 수감되었으며, 이후 아돌프 히틀러, 스탈린주의자, 전체주의, 미국의 베트남 전쟁에 대한 비판과 반대 운동을 펼쳤다. 그는 핵무장 반대운동에도 열렬히 참가했다.

러셀은 1900년대 초반 '관념론 반대운동'을 일으켰으며 그의 선배 프레게, 제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과 함께 분석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꼽히며 20세기의 선두 논리학자로 자리매김한다. 러셀은 화이트헤드와 함께 [수학 원리]를 저술했으며, 이는 수학을 이용해 논리학의 기틀을 닦고자 한 시도이다. 그의 철학 수필 On Denoting 은 철학의 패러다임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의 저술은 논리학, 수학, 집합론, 언어학, 철학 중에서도 언어철학, 인식론, 형이상학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생애
1872년 5월 18일 러셀은 영국의 총리를 지낸 존 러셀 백작의 손자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러셀에게는 프랭크와 레이철이라는 두 형제가 있었으며 이중 레이철은 1874년 어머니가 디프테리아로 세상을 떠난 뒤에 세상을 떠났다. 1876년엔 아버지가 우울증에 시달리다가 세상을 떠났고 남아있는 프랭크와 버트런드 러셀은 조부모의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할아버지 존 러셀은 1878년 세상을 떠났는데, 러셀은 할아버지를 휠체어에 탄 친절한 할아버지로 기억했다. 유년기의 대부분 동안 러셀은 할머니 러셀 백작 부인의 돌봄으로 자랐다. 

러셀의 가문은 몇 세기 전 튜더 왕조가 세워지며 권력을 얻어 영국의 자유주의적인 휘그당을 세운 가문이었으며, 영국 정치사의 중요한 사건, 1536~1540년의 수도원 해체, 1688~1689년 명예혁명과 1832년 영국 선거법 개정에 참여하였다.

러셀 백작 부인은 종교적으로 보수적이었으나, 종교 이외의 부분에서는 진보적인 입장을 취하여 다윈 사상을 지지했으며, 버트런드 러셀에게 사회정의에 대한 시각을 키워주었다. 할머니가 좋아하던 성서 이야기인 '다수의 사람들이 잘못을 저지를 때에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되며 다수의 사람들이 정의를 굽게 하는 증언을 할 때도 그들을 따라가서는 안된다는 러셀의 좌우명이 되었다. 당시 러셀이 살던 펨브로크 산장도 종교적으로는 상당히 보수적인 분위기였는데 러셀의 형 프랭크는 저항적이었으며, 러셀은 자신의 감정을 숨기면서 생활했다. 할머니는 공교육에 반대해 손자를 학교에 보내지 않고 가정교사를 초빙해 가르쳤기 때문에 친구를 사귀지 못한 러셀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 공포를 느끼기도 했다.

러셀의 부모는 당시 정치사상이 극단적인 쪽이었다. 러셀의 아버지 존 러셀은 무신론자였으며, 아이들의 가정교사였던 생물학자 더글러스 스펄딩과 자기 아내 간의 정사를 공식적으로 인정했으며, 부모 양쪽 모두 당시 사회 분위기에 앞서가는 '산아제한'의 지지자였다. 아버지 존 러셀의 무신론은 철학자 존 스튜어트 밀에게 러셀의 대부가 되어줄 것을 부탁한 데서 명확히 드러난다. 밀은 러셀이 태어난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사망했지만, 그의 저술은 러셀의 삶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러셀은 퍼 시비 시 설리의 저술을 찾아보고 자서전에 '나는 내 생각이 나 기분을 말할 사람이 없다는 걸 알고서 모든 여가 시간을 그의 저술을 읽으며, 마음 깊이 새기는데 보냈다. 나는 설리의 저술을 알게 된 것이 정말 환상적이라고 느꼈으며, 내가 인간으로서 그를 만났다면 큰 동정을 느꼈을 것이라고 생각하곤 했다'라고 기록했다. 15세가 되며 러셀은 기독교의 교리가 합당한가에 대해 생각하는데 많은 시간을 썼으며, 18세에 러셀은 완전한 무신론자가 되기로 결심했다.

러셀의 사춘기는 굉장히 고독했으며, 그는 몇 차례 자살 충동을 느꼈다고 회고한다. 러셀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당시 자신의 주된 관심사는 종교와 수학이었으며, 수학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고 싶은 마음에 자살을 하지 않았다고 서술한다. 러셀은 집에서 몇 명의 가정교사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의 형 프랭크는 러셀에게 유클리드 기하학을 가르쳐, 러셀의 삶을 극적으로 바꾸었다.

-결혼
러셀은 17세에 처음으로 퀘이커 교도였던 앨리스 페어 살 스미스와 만났으며 그녀의 가족과도 친밀한 관계가 되었다. 그녀의 가족들은 러셀이 존 러셀 백작의 손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며, 이후 러셀과 같이 대륙을 돌며 여행하기를 즐겼다. 그들과 함께 러셀은 1889년 파리 박람회에 참가해 당시 갓 건축된 에펠탑에 올라가기도 했다.
러셀은 수학과 철학에서 두각을 나타내어 1893년 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하고 1895년 선임연구원이 된다.
청교도적인 가치관을 가졌던 앨리스와 사랑에 빠지며, 할머니의 반대에도 1894년 12월 결혼한다. 그러나 둘은 1901년 함께 자전거를 타다가 러셀이 앨리스에게 자신이 그녀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을 고백하며 파경에 빠진다. 러셀은 앨리스의 어머니가 잔인하게 그를 조종하려고 하였기에 싫어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1921년 까지 별거하며 형식적으로만 부부로 남아있다가 이혼했다. 이 기간 동안 러셀은 오톨인 모델과 배우 콘서트는 말레는 등 여러 사람들과 열애 관계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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