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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버트런드 러셀 2 ( 인물 )

by 평싸10 2024. 2. 15.


-활동
1910년 러셀은 케임브리지 대학교 강사가 되었고, 여기서 오스트리아의 공학도였던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을 만나게 되었다. 비트겐슈타인은 곧 그의 박사과정 학생으로 들어오게 되었고, 러셀은 그를 천재이자, 자신의 논리학의 후계를 이을 사람으로 평가했다. 비트겐슈타인에 매료된 러셀은 많은 시간을 비트겐슈타인의 다양한 공포증과 우울증을 돌봐주는데 보내게 되었다. 이것이 상당히 러셀의 기력을 소모했지만, 러셀은 굽히지 않고 비트겐슈타인에게 학문을 하도록 권유했으며, 1922년 비트겐슈타인의 대표 저작 중 하나인 [논리 철학 논고]를 출판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1918년 러셀은 비트겐슈타인이 1차대전 전쟁 포로로 잡혀있는 동안 그의 철학적 아이디어를 재해석한 논리적 원자론 강의를 하기도 하였다.

러셀은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수학의 기초 원리를 연구하며, 집합론의 기초를 뒤흔드는 러셀의 역설을 발견한다. 1903년 그는 수리논리학에 대한 첫 번째 저작인 The Principles of Mathematics를 출판하고 여기서 수학은 매우 적은 수의 공리에서 유도될 수 있음을 보여 논리주의의 주장에 큰 근거를 실어준다.

러셀은 1896년 자신의 전 생애에 걸친 정치, 사회학에 대한 관심을 나타낸 [독일 사회민주주의]를 출간하고 이어서 같은 해에 런던 경제 대학에서 독일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강의를 시작한다. 그는 1937년 이 곳에서 다시 권력의 과학을 강의하기도 했다. 그는 1902년 페이비언 협회의 시드니 웹과 베아트리스 웹이 세운 식사 클럽 코에피션츠 에서 사회 개혁 운동가로도 활동했다.

1905년에 러셀은 철학 저널에 에세이 On Denoting을 싣고 1908년 왕립 학회 회원이 된다. 이후 1910년 [수학 논리] 1권을 화이트헤드와 함께 출간하여 수리철학 분야에서 명성을 얻게 된다.

-1차 세계대전 중 활동
러셀은 1919년 대학교에서 복직되었으나 1920년 강사직에서 물러났고 1926년 특강 강사를 잠시 맡았다. 이후 1944년~1949년 까지는 선임 연구원으로 활동하였다.

1차 세계 대전 중 러셀은 몇 안 되는 반전 운동가로 활동했다. 그리고 이에 따라 1916년에 트리니티 칼리지에서 해고 되었고, 100파운드의 벌금을 선고 받았다. 러셀은 감옥에 가기를 희망하여 이를 내기 거부 했으나, 정부에서는 러셀의 책들을 압수해 경매에 부쳐 벌금을 징수하였다. 압수된 서적은 러셀의 친구들이 구매했으며, 러셀은 '케임브리지 경찰에 의해 압수됨'이라는 낙인이 찍힌 왕 제임스 판 성경을 기념품으로 간직했다.

-1차 대전 후 활동
당시 러셀의 연인이었던 도라 블랙도 러셀과는 별개로 러시아를 같은 시기에 방문했는데, 그녀는 러시아 혁명의 적극적인 지지자였다. 하지만 러셀의 경험은 이전의 러시아 혁명에 대한 자신의 지지를 철회하게 했고, 자신의 경험을 회고하여, 영국으로 돌아갈 때 동료 24명이 러시아 혁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데 대해 반대 의견으로 설득하려고 한 이야기를 싣는다. 일례로, 러셀은 오밤중에 들은 총성을 이야기하며 이것이 비밀경찰의 총살이라고 주장하지만, 동료들은 자동차 엔진소리였을 거라고 흘려듣는 장면이 있다.

1921년 8월 26일 귀국 당시 돌아가 임신 6개월 차였기에, 러셀은 이혼을 서두르고 1921년 11월 27일 결혼했다. 두 사람 사이에서는 1921년 훗날의 제 4대 러셀 백작이 되는 아들 존 콘래드와 딸 캐서린이 태어났다. 러셀은 일반인을 위한 물리학, 윤리학, 교육학 서적을 출판하여 가족의 생계를 책임졌다.

1920년 8월 러셀은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미친 영향을 조사하기 위한 1920년 영국 대표단에 뽑혀갔다. 러셀은 블라디미르 레닌과 한 시간에 걸친 토론을 했으며, 회고록에서 레닌의 '악마적인 잔인성'을 발견했고 레닌의 성품을 '독선적인 교수'에 비교하며, 실망감을 표시했다. 그는 레닌의 공산주의 체제가 '전제적 관료주의 체제에 가까우며, 차르 시대보다 더 끔찍하고 정교한 감시 시스템 아래서 운영되고 있고, 오만하고 불쾌한 일종의 귀족 정치를 행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이후 증기선을 타고 볼가강을 내려가기도 했다.

-2차대전 이후 활동
러셀은 수학자로서 출발하여 [수학 원리]를 통해 수리철학 및 기호 논리학에 공헌하였다. 철학 등에 관한 평론도 있다. 주요 저서로 [수리철학 서설], [정신의 분석], [서양철학사], [권력] 등이 있다.

이후 1944년 귀국하여 모교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선임연구원으로 강의를 하였다. 1945년 원자폭탄이 발명되자, 그는 수소 폭탄의 발명을 예언하고 핵무기 반대운동과 함께 세계 평화운동을 벌였다. [러셀 서양철학사], 기독교 비평서[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닌가?]를 비롯해 많은 저서를 남겼다. 1950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사상
처음에는 대학에서 받은 교육 때문에 헤겔적인 절대정신만을 참된 실재라고 하는 관념적 일원론의 입장에서 지지했으나, 그것이 수학과 맞지 않는다는 것을 알자, 이 입장을 버리고 그 반동으로서 이번에는 많은 존재물을 인정하는 다원론의 입장을 취하였다. [철학의 문제들]에서는 개체와 보편, 감각과 물체를 함께 인정하는 이원론적 플라톤적 실재론의 입장에 지지하였다.

러셀의 철학사상은 흔히 지적되듯이 발전적이며 자주 변하였으나 그 기초가 되어 있는 철학에서의 분석적 방법은 일관되어 있고 이에 의해서 과학적인 철학을 수립하였다. 이 방법을 토대로 영국 경험론의 전통 위에 선 인식론을 전재하는 것이 그의 철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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