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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프리드리히 니체

by 평싸10 2024. 1. 18.


-프리드리히 니체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1844년 10월 15일 ~ 1900년 8월 25일 )는 독일의 철학자 이며 독일의 프로이센의 작센 지방의 작은 마을인 리켄에서 루터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이름은 프로이센의 왕인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서 빌려온 것으로 빌헬름 4세는 니체가 태어나던 날에 나이가 49세를 넘기고 있었다. 

니체는 1851년 소년학교에 다녔고 그다음에는 그가 구스타브 크루 크기와 빌헬름 필터와 친구가 되었던 곳인 사립학교에 다녔다. 두 친구 모두 알만한 명망 있는 가문 출신이었다. 1864년 졸업을 한 후에 니체는 신학과 고대 철학을 본 대학에서 공부하기 시작했다. 짧은 기간 동안, 니체는 도가 센 과 함께 대학생 학우회의 구성원이 되었다. 한 학기 후에 어머니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그는 신학 공부를 중단했고, 신앙도 상실하였다. 그것은 아마도 1835~1836년에 다비드 슈트라우스가 쓴 '예수의 생애'란 책에서 그가 담당한 부분을 읽어나가던 중에, 책의 내용이 젊은 니체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특출한 재능은 음악과 언어에서 발휘되기 시작했다. 그 후 국제적으로 유명한 슐로르타에 동료들처럼 입학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자기 학업을 1858년부터 1864년까지 계속했다. 그는 파울 돈이 쐰, 칼 핸드폰 게르도르프와 친구가 되었다. 또한 그는 시를 짓고 음악을 작곡하는데 시간을 들였다. 슐포르타에서 니체는 특히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해 배웠다. 그 동안에 그는 살면서 처음으로 조그만 시골 마을의 기독교적인 환경에서 이루어지는 가족의 삶으로부터 거리를 둘 수 있었다.

1867년 니체는 군에 자원하여 1867년 10월 군에 입대하였다. 그는 철학과 군 복무에 대해 고민하고 있던 중, 어느 날 꿈을 꾸게 된다. 내용은 어떤 시집을 읽었다는 것인데, 프리드리히 니체는 그것을 기억해 내 전쟁과 싸움을 잊고 학문에 매진하라는 뜻으로 받아들여 철학 공부에 매진하게 된다. 어느 날 그는 말을 타다가 사고를 당해서, 가슴을 심하게 다쳐 후송되었으나 군 복무를 지속할 수 없었다. 그는 군 복무를 5년 이상으로 하였고 높은 직위에도 올랐었다.

니체는 장기간의 병가를 받고 다시 학업에 관심을 둘 수 있었다. 근 프리드리히 빌헬름 리츨 교수 밑에서 철학을 공부하는 데 집중하였고, 1868년 10월에 리츠를 따라 라이프치히 대학으로 옮겼다. 거기에서 그는 엘리베이턴 로제와 친구가 되었다. 이 무렵 니체의 첫 철학 저서의 출판이 곧 이루어지게 된다.

니체 나이 24세에 리플의 도움으로 스위스 바젤 대학교의 고전 문헌학 교수에 취임하였다. 바젤 대학교에 들어선 이후, 니체는 프로이센의 국적을 포기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공식적인 시민권이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1870년에서 1871년까지 프랑스 - 프로이센 전쟁에서 군의관으로 활동했는데 발터 코프먼은 그가 군의관 활동 당시 매독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다시 발젤 대학교로 돌아오면서 그는 독일제국의 성립과 비스마르크의 등장을 보았다.

1869년 라이프치히 대학교에서 시험과 논문 없이 출판된 저술들만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니체는 1872년에 [비극의 탄생]을 썼다. 하지만 리플과 같은 니체의 동료들은 이 책에 대해 별로 열정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니체는 서구의 전통을 깨고 새로운 가치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에 '망치를 든 철학자'라는 별명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교 도덕과 합리주의의 기원을 밝히려는 작업에 매진하였고, 이성적인 것들은 실제로는 비이성과 광기로부터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그는 안티크리스트에서 유대인들이 그들의 망상으로 도덕이나 종교, 문화, 역사 등을 복구가 불가능할 정도로 왜곡했다고 말했다. 이는 유대인 혐오의 근거가 되기도 했는데, 니체에 의하면 유대인은 세계의 외면은 물론 내면도 포함해 모든 것을 사기 날조로 전복하는 운명적 민족이자 노예 혹은 약자로서 중요성이 있으며 귀족 같은 정신을 가진 고귀한 자들의 진정한 적이다. 그러나 니체는 강자의 입장을 찬양하면서도 때때로 약자의 도덕 등을 칭송하기도 해서 모순도 있다. 관념론과 기독교는 세계를 두 개로 구분 짓는다. 이를테면 기독교는 이승 이외에도 하늘나라가 있다고 가르친다. 또한 플라톤은 세를 현상계와 이데아계로 이분한다. 니체는 이러한 구분에 반대하며 '대지에서의 삶을 사랑할 것'을 주창하였다. 또한 현실에서의 삶을 비방하는 자들을 가리켜 퇴락한 인간 이라 부르며 비판하였다. 이렇듯 '영원한 세계' 나 '절대적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니체는 관념론적 형이상학에 반대한다. 니체는 기독교 신자들이 예수의 가르침과 달리 안 믿으면 지옥 간다는 멸망 적 교리만을 전했다며 기독교를 비판했다.
니체는 반유대주의, 민족주의, 전체주의 등을 비판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이 파시스트들에게 왜곡되기도 했다. 진리의 가치를 묻는 그의 질문은 해석상의 문제를 제기했다.

1873년과 1876년 사이에는 [반시대적 고찰]을 썼는데 총 4편으로 [다비드 슈트라우스, 고백자와 저술가]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교육자로서의 쇼펜하우어] [바이로이트의 리하르트 바그너]로 나뉜다. 4편의 에세이는 쇼펜하우어와 바그너가 주장하는 대로, 독일 문화의 발전 노선에 도전하는 문화 비평의 방향을 공유하고 있다. 1873년이 시작할 무렵, 니체는 또한 고대 그리스 비극에 나타난 철학 같이 사후에 출간된 기록을 점차로 모으고 있었다. 이 시기 동안 바그너와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니체는핸드폰 메이세요. 부르트기와 한스 한스 핸드폰 뵈고 우를 만났고, 1876년에 그에게 영향을 주어 그의 초기 저작 해소한, 파울 리와 우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그는 1876년에 바이로이트 축제에서 진부한 공연과 대중의 천박함에 혐오감을 느끼고 실망했기 때문에, 결국에는 바그너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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