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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엘무스 옥카무스 ( 인물 )

by 평싸10 2024. 2. 19.

궁리엘 무스 옥 카 무스는 1285년경 잉글랜드 왕국 오컴에서 태어나 1347년 10월 4일 62세의 나이로 신성로마제국 바이에른 공국 뮌헨에서 사망했다.

옥 카 무스는 오늘날에는 흔히 영어식으로 읽는 원리에 오컴이라고 부르며 오컴은 잉글랜드 서리 지방에 소재한 촌 동네로 윌리엄의 출신지로 알려져 있다.
윌리엄은 14세기 잉글랜드의 프란치스코회 탁발수도사, 신학자였으며
중세사상에서 중요한 인물 중 하나로 여겨지며, 14세기 중요한 지적, 정치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었다. 논리학, 물리학, 신학에 관한 중요한 저작을 다수 저술했다.

-생애
중세에는 페트루스 롬바르두스의 [명제 집]이 신학의 표준 교과서였고, 많은 야심 찬 스콜라 신학자들이 주석을 달았다. 
윌리엄도 이런 스콜라 주 석가들 중 하나였다. 그러나 윌리엄의 주석은 동료들이나 교회 당국에 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324년 주교회의에서 윌리엄의 주석이 비정통이라고 단죄했고, 윌리엄은 아비뇽 교황청으로 소환되었다. 조지 크니 시가 최근에 제기한 이설에서는 윌리엄이 신학적 문제로 아비뇽에 끌려간 것이 아니라, 원래 아비뇽의 프라니스코회 학교의 철학 교수로 임용되었다가 1327년 아비뇽에서 문제에 휘말렸다고 해석한다.

교황이 성자 프란치스코가 정한 회칙을 공격하고 들자, 윌리엄과 미켈리 등 프란치스코회 지도자들은 1328년 5월 26일 아비뇽에서 탈출해 신성로마 황제 루트비히 4세에게 망명했다. 대립교황을 세우고 요한 22세와 험악하게 싸우고 있던 황제는 윌리엄과 미 켤레의 보호자가 되어 주었다. 보호의 대가로 윌리엄은 제권이 교권보다 우위에 있으며, 신성로마제국 국내의 교회와 제후국에 대해서는 교황이 아닌 황제가 최고통수권을 가진다는 논문을 써 주었다. 1328년 6월 6일 윌리엄은 아비뇽에서 무단탈주했다는 이유로 공식적으로 파문되었다. 윌리엄은 사도 적 청빈과 선대 교황들이 인정한 성자 프란치스코의 무소유를 공격하는 요한 22세야말로 이단이라고 맞섰다. 하지만 윌리엄은 철학사상은 공식적인 이라고 단죄되니 적이 없다.

윌리엄은 1287년 잉글랜드 왕국 서리 백작령 오컴에서 태어나 런던의 프란치스코회 학교인 그레이프라이어스에서 초등교육을 받았다. 1309년에서 1321년까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한 것으로 추정된다. 윌리엄은 신학석사 과정을 모두 수료했지만 가 되지 못한다. 이런 이유로 가결한 초임 강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인쳅토르란 중세 대학에서 강사 자격을 처음 얻은 학생을 가리킨 말이다. 정교수가 되지 못한 윌리엄이지만 여느 정교수보다 박식하고 가결한다는 의미의 존경 의미가 담긴 경칭이다.

일반적으로 윌리엄이 처한 곤경은 옥스퍼드 총장 존 루터를 수작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한편 같은 시기 프란치스코회 총봉사자 미켈리 다 체세나도 이단 혐의로 아비뇽에 소환되어 있었다. 신학위원회에 [명제 집] 주석서를 검열받으러 온 윌리엄은 미 켤레가 관련된 또 다른 논쟁에 휘말리게 된다. 미 켤레는 같은 프란치스코회 형제인 윌리엄에게 사도 적 청빈을 둘러싼 논쟁을 살펴봐 달라고 청했다. 윌리엄은 요한 22세 및 그 이전의 교황들이 쓰고 말한 바를 연구해 보고, 미 켤레의 의견이 맞는다고 동의했다. 프란치스코회는 예수와 사도들은 사유적으로나 공유적으로나 어떠한 재산도 소유하지 않았다고 믿었고, 소속 탁발수도사들에게 무소유를 실천하도록 회칙에서 정했다. 이 문제로 프란치스코회는 교회의 재산 소유를 긍정하는 입장인 요한 22세와 첨예하게 갈등하고 있었다.

윌리엄은 그 뒤 미켈리 등과 함께 바이에른에 머물며 철학 연구보다는 정치 논고 저술로 여생을 보냈다. 1342년 미 켤레가 죽자 루트비히 4세의 궁정으로 망명한 프란치스코회 강경파 수도사들의 지도자가 되었다. 윌리엄은 1347년 4월 9일 죽었다. 흑사병이 남독일에 도달하기 직전이었다.

-철학 사상
효율적 추론으로 설명과 이론을 구축하면서 검약서의 원리를 이용해야 효율적인 추론을 할 수 있다는 소위 오컴의 면도날은 근대과학과 근대지적 문화에 대한 지대한 공헌으로 알려져 있다. 오컴의 면도날은 '어떠한 가설상의 존재자를 가정하지 않고도 어떤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면, 그 존재자를 가정할 근거는 없다. 즉 원인, 요인 최소한의 설명이 최선의 설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 말은 버트런드 러셀이[서양철학사]에서 해석해서 퍼뜨린 버전이고, 윌리엄 본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없다.

윌리엄 본인이 형식화한 오리지널 오컴의 면도날은 다음과 같다. '스스로 증거되거나 경험으로 알려졌거나, 신성한 경전의 권위로써 증명되지 않은 한, 그 무엇도 이유를 주지 않으면 사실로 상정될 수 없다.' 윌리엄에게 있어 유일하게 진실로 필연적인 존재자는 기독교의 신, 하느님 하나뿐이었고, 그 밖에 다른 모든 것은 우발적인 것이었다. 윌리엄이 충족이유의원리를 수용하지 않은 것, 본질과 실존의 구분을 거부한 것, 토마스주의를 반대한 것이 모두 그런 이유에서였다. 윌리엄의 존재론적 검약 성은 인간의 이성이 영혼의 불멸,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없다는 회의주의로 이어진다. 그러나 윌리엄의 결론은 그런 것들을 가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무신론이 아니라, 그런 것들은 오로지 계시에 의해서만 가르침 받을 수 있는 신앙의 영역이라서 이성이 범접할 수 없다는 신앙주의였다.

윌리엄은 방법과 내용 모두에서 스콜라주의의 개혁을 추구했다. 그 목적은 단순화였다. 윌리엄은 자기 이전의 신학자들, 특히 둔스스코투스의 업적 대부분을 종합해 냈다. 윌리엄은 둔스스코투스로부터 신의 전능함에 대한 견해, 은혜와 정당함에 대한 견해, 인식론과 윤리적 신념을 계승했다. 그러나 윌리엄은 운명 예정설, 고행, 보편성, 검약 성에 대해서는 둔스스코투스와 의견을 달리했다. 특히 검약 성에 대한 명제가 그 유명한 오컴의 면도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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