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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토마스 아퀴나스 ( 인물 )

by 평싸10 2024. 3. 7.



토마스아퀴나스는 1225년에 태어나 1274년 3월 7일에 사망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탈리아의 나폴리 근교 로카세카 성에서 아키노 지방 영주 중 하나인 란돌포의 9남매 중 7번째 아들로 태어났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태어난 날의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에 따라 그가 사망한 날짜로 1274년 3월 7일을 기준으로 그가 태어난 해를 추정하였을 뿐이다.

아퀴나스는 서방교회의 저명한 신학자이자 스콜라 철학이다. 또한 자연신학의 으뜸가는 선구자이며 서방교회에서 오랫동안 주요 철학적 전통으로 자리 잡고 있는 토마스학파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교회 학자 서른세명 중 하나이며, 현재 로마 가톨릭교회는 아퀴나스를 신학자요 박사로 존경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토마스 아퀴나스의 이름을 딴 학교나 연구소 등이 많이 있다.

- 성장기

아퀴나스의 아버지는 1231년경 막내아들 토마스를 성 베네딕토 수도회 소속의 몬테 카시노 수도원으로 보냈다. 여기서 토마스는 수도사 수업을 받는다. 전기 작가들은 토마스 아퀴나스가 몬테 카시노 대수도원에 들어가게 된 까닭이 그가 미래의 수도원장으로 성장하길 바랐던 토마스의 부모들의 기원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1239년경 토마스는 당시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수도사가 되는 수업을 중단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부닥친다.

역사학자들은 이때 토마스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과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을 접했다고 추정한다. 특히 도미니크회 수도사들과의 만남은 그의 삶을 결정적으로 바꾸는 계기로 작용한다. 미래의 몬테카시노 수도원장으로 성장해 줄 것이라는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린 채 1244년 토마스 아퀴나스가 당시 프란체스코회와 더불어 새롭게 등장한 도미니크회의 수도사로 들어갔기 때문이다.

귀족의 아들로서 몬테 카시노의 수도원장이 될 수 있는 화려한 삶 대신 소박한 삶을 사는 수도사가 되기를 선택한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는 부유한 상인의 아들로 누릴 수 있었던 모든 화려한 삶을 포기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의 모방하기로 결심한 아시시의 프란체스코의 일화를 더 연상시킨다. 더 나아가 화려한 미래가 보장된 길 대신 청빈한 수도사의 길을 선택한 소년 토마스 아퀴나스의 일화를 통해 우리는 이후 재 속 성직자들과의 논쟁에서 탁발 수도회의 정당성을 옹호하는 단호한 수도사와 대주교직을 정중히 사절하게 되는 겸손한 수도사의 모습을 동시에 엿볼 수 있다.

몬테 카시노 수도원을 나온 후 당시 프레데리쿠스 2세의 후원으로 성장일로의 있던 나폴리대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나폴리 대학교에서 토마스 아퀴나스는 당시의 7개의 필수 학문인 문법, 논리학, 수사학, 대수학, 기하학, 음악, 천문학을 배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토마스의 가족은 도미니크 수도원의 주선으로 파리로 유학 가던 토마스를 도중에 납치하여 로카세카성에 감금했다. 그리고 약 1년여간 회유와 협박을 동원하여 도미니크회에서 탈퇴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어떤 노력으로도 그의 소신을 굽힐 수 없음을 알게 된 가족들은 결국 1245년 여름 토마스 아퀴나스를 나폴리의 도미니크회 소속의 수도원으로 되돌려 보낸 일도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가족들의 연금에서 풀려나 나폴리로 돌아온 1245년부터 1248년까지의 행적, 특히 토마스가 1245년부터 1248년까지 그가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를 따라 독일의 퀼른으로 떠날 때까지의 3년 남짓한 기간의 행적에 대해서 여러 얘기들이 있었다.
그러나 토마스가 1245년부터 1258년간 파리 대학교 혹은 파리의 도미니크회에서 토마스가 7개의 필수 과목을 공부했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파리대학에서 강의하던 알베르투스의 신학 강의를 들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인문학부에서 수학한 이후에나 신학과에 진학하여 신학 수업을 들을 수 있었던 중세 대학 체제 상 토마스에게는 알베르투스의 강의를 들을 자격이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3년간의 파리 체제 이후 1248년 토마스는 퀼른에 있는 도미니크회 수도원에서 비로소 알베르투스 마그누스로부터 4년간 지도를 받게 되었다고 보는 것이 더 개연적이다. 이 시기에 토마스는 알베르투스의 영향 아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은 물론 디오니시우스의 신학에 대한 깊이 있는 연구를 수행한다. 당시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다른 동료들이 붙여준 별명은 그의 우람한 몸집과 과묵한 성격을 바라보던 동료들의 장난기가 섞인 '시칠리아의 벙어리 황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 별명과 관련하여 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알베르투스가 '지금 벙어리 황소라 불리는 저 수도사의 우렁찬 목소리를 온 세상이 듣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소심한 젊은 제자의 침묵 뒤에 숨겨진 무한한 재능과 역량을 꿰뚫어 보고 이것이 꽃피울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준 스승 알베르투스의 자상함과 혜안이 그가 전수한 학문적 지식과 더불어 미래의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어떤 영감으로 작용하게 되었는지를 미루어 짐작하는데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이 별명과 이와 얽힌 일화들이 진실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고 분명하지도 않다. 그렇지만 이 전설들이 외국 땅에서 불안한 외국어 구사 능력으로 인해 혹은 몇몇 이야기들이 전하듯이 토마스가 말더듬증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입장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그래서 벙어리 황소라는 별명으로 동료들에게 놀림을 받았던 이 소심하고 섬세한 감성을 가진 청년 수도사 토마스의 숨겨진 일면을 드러내 주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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